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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REVIEW/영화

당신의 이웃은 어떤 사람인가? 영화 램페이지

by in사하라 201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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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근대화 초기 노동자들은 모두 똑같은 생활, 일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해 그들의 노동력을 기준치 이상으로 착취당했고, 또 교육받지 못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들 세상의 전부는 일터와 집, 그 둘이 전부였다. 교육받지 못했고 미디어도 현재만큼 발달하지 못했기에 그들 자신들이 사는 세상, 일터가 세상의 전부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획일화되고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개성이 강조되고 다양성이 보장되는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형화 되어있거나 남들과 똑같은 이들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다양성은 분야의 다양성과 정도의 다양성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분야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 구조와 구성요소가 세분화 되었음을 의미하며 정도의 다양성이란 이러한 세분화 된 것들의 심화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분야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또한 다양성의 영향이 미치는 범주에 속하며 이에따라 사람들, 더욱 가깝게는 우리 이웃들, 친구들, 더욱 가깝게는 가족들의 성격적 측면에서도 다양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이 우리 사회에 분명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언제나 밝은 면의 이면에는 어둠이 짙게 내리깔리기 마련이다. 다양성의 두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어두운 면을 간략히 살펴보자.

분야의 다양성 : 싸이코패스
싸이코패스도 결국은 우리 인간의 다양한 성격의 범주 중 하나이다. 사실 인격장애, 정신병으로 분류되지만 분명 분류될 수 있는 인간 유형의 하나이다. 사실 모든 싸이코패스가 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만 싸이코패스 환자가 500만명이 있고, 이중 몇만 정도가 살인자라한다. 싸이코패스는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아 충동적이고 즉흥적 행동을 한다. 또한 거짓말에 능하다.

정도의 다양성 : 극단주의자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지만 이들 중 한 범주 내에서 유독 강한 성향을 나타내거나 특별히 약한 성향을 나타내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 예는 쉽사리 우리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정치에서 흔히 오른쪽에 치우쳐있다, 왼쪽에 치우쳐있다 이야기할 때, 유독 오른쪽에 치우친 경우를 극우,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친 경우를 극좌라 구분하는 것이 한 예이다. 유독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를 하는 이들은 싸이코패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이다.

영화 <램페이지>는 특히 극단 주의자에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영화를 보고 쉽사리 주인공 빌 윌리엄슨을 싸이코패스라 단정짓는 이들이 종종있는데, 사실 그는 분명한 극단주의자이다. 위 설명에서도 나타나지만 싸이코패스는 매우 충동적이다. 반면 빌은 전혀 충동적이지 않다. 한번의 실행을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충동적 상황 속에서도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행위에는 그의 자신만의 타당한 이유와 논리도 있었다. 놀랍게도 빌이 이러한 계획을 세운 이유는 바로 환경 문제를 양산하는 인구 과잉의 억제이다. 사실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일이 아닐 뿐더러 그 심각성이 날로 증대하고 있다. 날로 발달하는 의학기술은 인간 생명의 연장을 통해 인류 고령화 시대를 열었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생존하는 인류에게 인구 과잉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실제로 어떠한 문제에 '과잉'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면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조절'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활동을 실행하게 된다. 인구과잉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방안은 바로 인구조절이어야 할 것인데, 인구조절이라는 것의 정의가 사실 좀 불명확하다. 미래 인구라는 측면에서는 출산억제 정책을 통한 인구조절이 가능하겠으나 현재의 관점에서 현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그 개체수를 직접적으로 감소시키는 활동이 바로 인구조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도의적으로나 법률적으로 행해져서는 결코 안되는 형태의 조절이므로 우리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을 뿐더러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이를 금기시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램페이지>에서는 이러한 금지된 선을 바로 한 명의 극단주의자가 거리낌없이 넘어서는 것이다. 인구가 많으니 그 인구를 줄여야겠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기반한채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 난사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빌은 그들을 심판했다 이야기한다. 영화 속의 빌은 말로만 떠들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비웃는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특히 일부 특권계층은 환경에 대해 경고하고 논의하지만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빌은 이러한 이들을 행동으로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빌은 과연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분명 그의 행위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생각은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과연 빌은 이러한 판단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왜 그가 심판해야 하며, 그는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오랜 세월간 자연의 순환 작용은 인구를 조절하고 이를 통해 자연의 균형을 이루어왔다. 오직 자연만이 생사의 문제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를 이미 극복하고 자연에 순응하기를 거부했다. 세월이 흘러 인류의 개체수는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났고, 머지 않은 미래에 자원고갈, 식량부족, 환경오염의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자연에의 순응을 거부한 우리는 스스로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오직 자연만이 결정의 권한이 있지만 이미 인간은 자연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빌은 자신이 이러한 자연을 대신하겠다 생각한 것일까?


[빌은 자원고갈, 식량부족, 환경오염문제의 원인인 인구과잉을 '조절'하고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한다. 집에서는 가족이 있고, 집 밖에는 수많은 이웃들과 한데 뒤엉켜 생활한다. 직장에는 수많은 동료가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숨을 쉬고, 출퇴근 시간에는 엄청난 인파가 직사각형 빌딩과 지하철에서 터져나온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가야만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처럼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개성을 부여했고, 이제는 그 어두운 면이 구석구석에서 불거져 나오고있다. 빌 윌리엄슨은 한 가정의 아들이었고, 한 아이의 친구였고, 누군가의 이웃이었다. 우리 주변에도 빌 윌리엄슨 같은 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전제로 할 때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 누구의 친구, 누군가의 이웃들 중 한명은 싸이코패스이거나 지나친 극단주의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문제는 뉴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고 분명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았다. 해결방법은? 필자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에게 닥친 현재는 과거의 우리가 한 행동을 원인으로 한 결과, 미래라는 사실 외에 떠오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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