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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REVIEW/영화

인간의 집착을 잘 나타낸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

by in사하라 201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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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집착이라는 감정의 범주는 너무나도 크고 다양해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집착 하나하나의 가지들을 지탱하고 있는 그 굵은 몸통은 보다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하나의 집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목숨, 생명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소소한 것들의 바로 위에는 돈, 명예, 권력 따위의 가치가 존재하며 이러한 가치의 위에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결국 가장 상위에는 생명, 소위 죽음으로 경계지을 때 그 이전의 살아감이라는 범위 안에서의 활동에 지독히도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집착이 아주 자세히 드러나있다. 뿐만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집착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영화이다.



인간이 생명, 목숨에 그리도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무지에 의한 결과라 여겨진다. 우리는 결코 정지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흐름 안에 귀속되어 살아가고 있다. 초, 분, 시, 일, 월, 년과 같은 개념들은 사실 실제로는 구분할 수 없는 연속적인 시간을 인간이 인위로 구분지어 놓은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을 구분짓고, 지배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임의로 늦추거나 정지하도록 조정할 수는 없다. 시간을 지배할 수 없기에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수 많은 사람들이 겪어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겪어야 할 이 경험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세상 이후의 삶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없기에 결국 무지에 의한 두려움이 인간의 내면에 깊숙히 내재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귀신, 유령 따위의 개념들 또한 사후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대한 두려움에 기인해 인간이 창조한 것들이다. 결론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의 유한함을 절감토록 하고 이것이 삶에 대한 애착을 증폭시키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유한한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 추구하게 되는 가치가 바로 돈, 명예, 권력 따위의 것들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에서 주인공 클레멘스 포렐은 전쟁 포로로 러시아에 끌려가고 그 안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시베리아 동쪽 끝에서 유럽까지 무모한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즉 삶에 대한 애착으로 이러한 탈출을 시도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이전에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 두려움에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평원 안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그가 느끼는 외로움, 그의 절규는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적 속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토록 차가운 한파와 굶주림, 외로움 속에서도 기약없는 계속 되는 그의 전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실 <마지막 한 걸음까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카마네프 중위라는 인물이다. 인간의 집착의 다양성을 정확히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카마네프 중위이다. 클레멘스 포렐이 수용소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후 모든 이들, 일개 졸병부터 수용소 소장에 이르기까지 클레멘스 포렐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독한 한파가 들이닥친 시베리아를 걸어서 횡단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분명 추위 때문에,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었을 것이라 다들 이야기하지만 카마네프 중위는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지독히도 클레멘스를 추격하던 카마네프 중위는 결국 국경에서 클레멘스 포렐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 보는 내내 의문이었던 것은 겨우 한명의 포로를 잡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채 무엇 때문에 그리도 집착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저 싸이코 쯤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던 카마네프 중위는 결국 국경에서 그 이유를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다. 클레멘스 포렐이 국경을 넘도록 한 걸음 비켜주며 하는 한 마디 "나의 승리군." 결국 그는 그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과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그의 집착을 형성케 한 것이었다.


[결국 국경에서 클레멘스 포렐과 마주한 카마네프 중위는 "나의 승리군"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를 보내준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독일(나치)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표현한데 반해 <마지막 한 걸음까지>에서는 반대로 전 후의 독일인을 약자로 표현해 기존의 공식을 무너뜨렸다. 사실 이러한 시도가 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돕는 독일 장교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당시의 독일인을 인정 없는 살인마 쯤으로 표현해 왔기에 단지 이런 표현방식이 우리에게 어색하게 다가올 따름이다. <피아니스트>에서의 시도에 비해 <마지막 한 걸음까지>의 설정은 조금더 진일보 했다 볼 수 있는데, 유태인 = 포로, 독일인 = 냉혈한이라는 공식을 독일인 = 포로, 러시아인 = 냉혈한이라는 공식으로 전환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참전한 대부분의 독일 병정들 또한 가족애를 가진 인간이며 살인마나 냉혈한이 아닌 하나의 살아 숨쉬고 교감하는 개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사실 본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은 필수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시베리아의 지리적 특성이나 그 광활함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과 부도를 한번 더 펼쳐 볼 수 있는 노력이 영화의 감상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 된다. 시베리아의 지리적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면 클레멘스 포렐의 여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기 보다는 클레멘스 포렐과 카마네프 중위의 행동과 심리상태에 집중해 영화를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로로 잡혀가는 클레멘스 포렐의 모습(가운데). 영화 속 포로로 등장하는 독일인들은
기존의 영화들이 나타내던 그들의 모습과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를 통해 인간의 집착적 측면과 소규모로 구분된 단체나 분류가 아닌 총체적 인간에서 찾을 수 있는 속성이 그간 잔인하게만 그려지던 독일인들에게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켜서 참전할 수 밖에 없었고, 죽지 않기위해 사람을 죽였던 한 딸의 아버지이자 우정과 인연으로 맺어진 한 전우였던 클레멘스 포렐의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생명과 삶 그리고 굳어버린 우리의 사고방식(나치는 냉혈한이라는 고정관념, 사실 결과와 전체적인 입장에서 분명 그들은 냉혹했으나 전체가 그러했다고 이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그러하다는 생각은 오류이다.)을 깨뜨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는 2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훌륭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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